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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Book] 대화란 무엇인가(On Dialogue) - 대화에 참여하는 개인으로서 필요한 전제

by 곰민 2024. 8. 6.

대화의 참여하는 개인으로서 필요한 전제  데이비드 봄의 대화란 무엇인가 리뷰

오늘 리뷰할 책은 전통적인 개발 서적은 아니지만, 협력에 큰 도움이 될수 있는 '대화란 무엇인가'입니다.
데이비드 봄은 대화를 통한 더나은 협력자가 되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대화란 무엇인가 는 단순한 의사소통 가이드를 넘어, 효과적인 대화의 본질과 그 힘을 탐구하며,
복잡한 의사소통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서론


책에 대한 글을 작성할 때 책내용에 관한 글 맨 서두에 

메타포의 역할을 하는 글과, 이미지를 넣어 내용을 함축적으로 전달하려 노력해 보았다.


콘웨이의 법칙(Conway's law)



https://www.melconway.com/Home/Conways_Law.html

 

Conway's Law

In 1967 I submitted a paper called "How Do Committees Invent?" to the Harvard Business Review. HBR rejected it on the grounds that I had not proved my thesis. I then submitted it to Datamation, the major IT magazine at that time, which published it April 1

www.melconway.com

 

Any organization that designs a system (defined broadly) will produce a design whose structure is a copy of the organization's communication structure.

 

(넓은 의미로 정의된) 시스템을 디자인하는 모든 조직은 그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본딴 구조의 디자인을 만들어 내게 된다

 

개발 하는 사람들에게 일종의 상식처럼 박혀져버린 "소프트웨어 구조는 소프트웨어를 설계하는 조직의 커뮤니케이션 구조를 닮는다" 의 원문이다.

 

하나의 모놀리식한 거대한 소프트웨어 구조내에서도 도메인에 따라서, 역할에 따라서 팀이 나뉘기도하며.

DDD 환경 내에서의 바운디드 컨텍스트 단위, 도메인단위,

MSA 환경 내에서의 워크로드 단위등

조직구조는 세분화가 되는 경향이 있다.(정말 혼자서 일을하지 않는 다면)

 

전체로서의 시스템을 신뢰성있는 시스템으로 만들기 위해서 올바른 대화의 참여가 우선되어야 한다.

 

하나의 팀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팀내에서의 대화의 방식에 따라서 시스템은 특정방향으로 진행되게 되어있다.

 

우리는 모델, 도메인, 코드 사이에 인터페이스가 아닌 현실세계 에서의 인간인 우리는 우리를 이어주도록

진화한 어떤 수단을 잘 활용할 필요가 있다.

 

맞다 결국 중요한 것은 너무나도 뻔하지만 결국 대화 이다.

 

그렇다면 대화를 하는것에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지 않는가?

 

대화에 참여하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이기 때문에 오히려 이 대화의 참여하는 순간에 여러가지를 놓치고 있지 않는지 의심해봐야 한다.

 

Eric Evans가 말한 Ubiquitous Language


 

Eric Evans의 도메인 주도 설계라는 책을 인상깊게 읽었으나 개인적으로 아쉬운 두가지가 존재한다.

 

한가지는 이벤트에 대한 내용이 크게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 조금 아쉽고,

 

다른 한가지는 심층모델과 UL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도메인 전문가와 개발 구현자들 사이에 대화의 참여를 중요시 여기는데,

개인과 개인, 1:N, N:N이 될수 있는 대화의 참여 과정에 있어서 대화의 방식이 올바르게 흘러가는 것을,
DDD라는 문화를 공유하고 공통의 생각을 갖게 됨으로서 달성할 수 있다고 가정 하는것 같아 보인다.

데이비드 봄이 On Dialogue 에서 주장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대화하는 것에 존재하는 어려움을 인식하고 더나은 방법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 했다.

 

자 이제 책의 내용으로 들어가보자.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은 무엇이고 어떤것들이 커뮤니케이션을 가로 막고 있는 것인가.


"The great enemy of communication,  we find,  is the illusion of it."
커뮤니케이션의 가장 큰 적은 바로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illusion 이다.
William H. Whyte - Fortune magazine in 1950 -

 

커뮤니케이션 communication 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런 질문의 논의를 시작해보자.
커뮤니케이션은 '공통의', '공유의' 등의 의미를 가진 라틴어 'commun'에 접미사 'ie'를 붙인 형태다.
접미사 'ie'는 'fie'와 유사한대 '만들다 혹은  하다' 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동사 형태인  to communicate 의 한가지 의미는 '뭔가를 공통된 것으로 만든다' 이다.
다시 말해보니 정보나 지식을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가능한 정확한 방식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뭔가를 말하고, 상대가 그에 반응한다 해도 의미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의미가 비슷할 뿐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의 반응을 보고 자신이 말하려 했던 것과 상대가 이해한 것 사이에 차이를 인식한다.
차이를 인지하고 생각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관점과 상대의 관점 모두와 관련된 새로운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반복적으로 일어나는데 대화의 참가자들이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어떤 개념이나 정보를 그대로 공유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참가자들이 공동으로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 간다고 할 수 있다.


위 문장을 보고 바로 DDD 내에서 심층 모델을 만들어가는 과정 사이에서 Ubiquitous Language를 만들고 수정해가는 것이 생각 났다.

 

하지만 여기에는 조건이 있다.
커뮤니 케이션이 무조건 새로운 뭔가를 창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는 편견이나 상대에게 영향을 주려는 의도 없이 타인에 말에 자발적으로 귀를 기울여야 한다.
쌍방의 주된 관심은 진실과 일관성이어야 하며, 필요하다면 자신의 기존 생각과 의도를 버리고 다른 것을 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양쪽이 서로에게 고정된 정보를 주듯이 특정 개념이나 관점을 전달하려고 든다면 커뮤니케이션은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상대의 이야기를 본인의 사고라는 그물망을 통해 걸러낸 상태로만 듣기 때문이다.
또한 진위나 일관성 여부에 상관없이 자신의 기존 생각을 유지하고 방어하려 하기 때문이다.
결과는 혼란이고, 커뮤니케이션 문제를 야기한다.

 

사람이 무엇인가에 대해 말이나 생각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옮길 때는 자신이 이미 타당한 방식으로 상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고 믿는 경향이 있다.
자신에게 이런 믿음을 가지면 편견을 갖고 타인에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상대로, 결국 문제는 상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누구나 다른 사람이 특정 질문에 막혀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의식은 못하지만 자신에게 아주 중요한 특정 아이디어 안에 존재하는 모순에 직면하는 것을 피하고자 폐쇄적인 태도를 취한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대화를 강조하고 대화가 중요하다는것을 알지만 변화하는 조직구조 내에서, 변화하는 역할 내에서 대화의 참여자로서 인지하고 있어야하는 부분들이다.

개인이 대화에 참여하기 위해서 인지해야 하는 올바른 방향의 커뮤니케이션이 힘들 수 있는 이유들이다.

 

데이비드 봄은 이러한 폐쇄성을 아에 의식하지 못하는 마비 상태라고 말하며,

스스로의 사고를 관찰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가로막는 내면의 움직임에 온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커뮤니케이션에서 힘든 이유들이 존재하는것을 알겠다.

그렇다면 대화는 어떤 특성을 갖고 있고 어떤것들이 대화를 어렵게 만들까?

 

대화란 무엇인가?


 

 

"Dialogue is a stream of meaning flowing among and through us and between us"
대화는 우리 사이를 흐르고 우리를 통해 흐르는 의미의 흐름이다.
- David Bohm -

 

 dialogue는 그리스어 'dialogos'에서 유래했다.
'logos' 는 말(word)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말의 의미 라고 생각할 수 있다.
dia는 'though'즉 통과하여, 사이로 등의 뜻이다.
특히 'dia' 가 '둘' 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따라서 대화가 반드시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다는 생각을 버려라.
우리 내부와 사람들 사이를 통과하여 흐르는 '의미의 흐름 (stream of meaning) 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대화는 전체 집단안에서 의미의 흐름을 가능하게 해주며, 이를 통해서 새로운 이해가 출현할 가능성도 있다.

 

대화를 'discussion(토론) 과 비교해보자.
'discussion'은 'percussion(충돌)' , 'concussion(충격)' 등의 단어와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discussion'은 뭔가를 나눈다는 의미로 분석이라는 개념을 중시한다.
토론에도 분명 나름 가치가 있지만 제한적이며, 다양한 관점을 넘어 멀리 나아갈 수가 없다.
탁구와 비슷해 아이디어를 던져 주고 받는데 목적은 점수를 따고 이기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토론의 가장 흔한 형태이다.
하지만 대화에서는 누구도 이기려고 하지 않는다.
대화에서는 점수를 얻으려는 시도도, 자신의 견해를 지배적인 견해로 만들려는 시도도 없다.

 

단어로 보는 대화와 토론의 의미를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왜 많은 조직과 개인들이 진정한 의미의 대화를 나누는 데 어려움을 겪는지 더 명확히 알 수 있다.

우리는 종종 대화 라는 이름으로 실제로는 토론이나 논쟁을 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이해와 통찰을 얻기보다는 자신의 관점을 방어하거나 관철시키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대화가 힘든 한가지 이유는 모든 사람이 서로 다른 가정과 의견을 갖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피상적인 가정이나 의견도 있지만 근본적인 것도 포함 된다.
삶의 의미, 자신과 국가, 몸담고 있는 종교의 이익에 대한 가정,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가정등.
누군가가 자신의 가정에 도전하면 사람들은 이를 방어하려 든다.
어떻게든 자신의 가정을 방어해야 직성이 풀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감정적인 공격도 서슴치 않는다.
.....
사람들은 자신과 자신의 의견을 동일시 한다.
그리고 자기 의견 고수가 자신의 이익으로 이어진다고 믿는다.
요지는 대화는 이런 가정들 이면에 있는 모든 압력을 고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가정들 이면에 있는 압력을 고찰해본 적이 있는가?

과거의 부끄러운 순간들이 생각이 난다.

하지만 나는 앞으로 내 안에서 강한 필요를 동반하는 가정들을 좀더 멀리서 바라볼수 있게 되었다.

 

대화의 주체로서 우리는 사고를 한다.

대화와 밀접하게 연관된 사고는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가?


대화와 사고


 

 

"The map is not the territory."
지도는 영토가 아니다.
- Alfred Korzybski -

 

우리가 갖고 있는 다른 의견은 과거 사고 (thought) 의 결과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경험, 다른사람에게서 듣거나 듣지 않은 내용등은 우리 기억 속에 각인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의견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무조건 지키려는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사실 대화의 목적은 전체적인 사고 과정에 파고들어 집단적으로 사고 과정을 바꾸는 데 있다.
우리는 하나의 과정으로서 사고에 진정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본 적이 없다.
내용에만 주목했을 뿐 과정에는 아니었다.
우리의 사고 역시 하나의 과정이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계가 고장 나듯 사고도 잘못 된다.

 

사고로 인해 야기되는 어러움을 예로 들어보자.
대표적인 것이 파편화 인데 이는 사실이 아니라 사고에서 기인한다.
모든 것을 나누고 구분하는 것이 바로 사고다.
세계는 하나의 통합된 그림자 같은존재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특정한 것을 선택하여 다른 것과 구별 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구별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개별 가정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사고에서 비롯된다.
....
사고는 적극적으로 많은 일을 하고 있는데 사고 과정은 사고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그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알려줄 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
세상이 단지 인간의 편의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이용할 것이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할 것이다.
....
사고는 결과를 만들어 내지만 자기가 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고의 과정은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역동적이다.

사고는 단순히 정보를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 기억, 감정, 그리고 문화적 배경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작용하는 과정이며,

이 과정은 대부분 무의식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종종 그 결과만을 인식하고 그것을 객관적 현실로 받아들이곤 한다.

 

데이비드 봄은 사고로 인해 야기되는 어려움은 다양하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은 파편화라고 말을 한다.

이는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사물을 분류하고 구분하는 과정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파편화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1. 전체적 맥락 및 이해 상실 : 개별 요소에만 집중하다 보면 전체적인 맥락 및 이해를 을 놓칠 수 있다.
  2. 고정 관념 형성: 특정 구분에 익숙해지면 그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3. 소통의 어려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구분하는 사람들 사이의 소통이 어려워진다.
  4. 문제 해결의 한계: 파편화된 시각으로는 복잡한 문제의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어렵다.

 

사고의 특성을 파악했을 때,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사고와 가정에 갇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갇혀있지 않을 수 있을까?

 

가정 유보


"Assumptions are the termites of relationships." 
가정은 관계의 흰개미이다 
- Henry Winkler -

 

사고에는 두종류가 있다.
개인적인 사고와 집단적인 사고가 그것이다.
....
집단적 사고(collective thought)는 개인의 사고보다 훨씬 강력하다.
개인의 사고는 대부분이 집단 사고와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언어는 전적으로 집단적이며 언어로 표현되는 거의 모든 사고도 마찬가지다.

 

인간의 일반적인 사고를 빛에 비유하면 당연히 비간섭성 빛이라 할 수 있다.
온갖 방향으로 분산되어 있고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고에서는 '비일관성'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일관된 방법으로 함께 사고 한다면 모인 레이저 광선 처럼 엄청난 힘을 가진다.
내가 권장하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개인의 사고는 대부분 집단 사고와 타인과의 상호작용의 결과물이다.
이는 우리의 사고가 독립적으로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봄은 언어의 집단적 본질을 강조하며, 언어로 표현되는 거의 모든 사고가 본질적으로 집단적이라고 주장한다.

 

일관된 방법으로 함께 사고 한다면 큰 힘을 가질수 있게 된다 라고 말한다.

 

어떤 집단이든 구성원은 각자의 가정을 집단으로 가져오는데 만남이 지속되면 그런 가정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가정을 유보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가정을 가져오되 그대로 따르지도 않고 그렇다고 억누르지도 않는 태도다.
가정을 믿지도 그렇다고 불신하지도 않는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도 않는다.
외부적으로 상대를 모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의 내면에 생긴 상대에 대한 모욕도 유보한다.
내면의 반응 또한 유보한다는 것이다.
거울 앞에 서서 비춰보는 것처럼 감정을 눈앞에 매달아 두고 관찰한다고 생각 할 수도 있다.
감정을 억눌렀다면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볼 수 있다.

 

일관된 방법으로 함께 사고 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 할까?

데이비드 봄의 '가정 유보' 개념은 단순히 판단을 중지하는 것을 넘어서는 깊이 있는 인식 과정이다.

이는 우리의 사고 패턴, 믿음, 그리고 가정들을 적극적으로 관찰하고 검토하는 메타인지적 접근을 요구하는것 같다.

데이비드 봄은 이를 통해 우리가 보다 열린 대화와 창의적인 문제 해결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대화에서 가정을 고수하려는 강한 충동들이 왜 발생하는 것일까?

 

필요로 인한 충동


"The need for certainty is the greatest disease the mind faces."
확실성에 대한 욕구는 마음이 직면하는 가장 큰 질병이다.
- Robert Greene -

 

필요하다 는 뜻의 영어 단어 'necessary'가 '양보하지 않는다' 는 의미의 라틴어 'necesse'에 어원을 두고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롭다.
정말 '한쪽으로 치울 수 없는 것' 이라는 뜻이다.
문제를 한쪽으로 치우거나, 치울 수 없는 필요 불가결한 사항, 즉 필요(necessity)가 생길 수가 있다.
상대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옆으로 치울 수 없는 '필요' 가 있을 수 있다.
각자의 '필요'가 절대적이며, 이런 절대적인 '필요'가 서로 충돌한다.
양쪽 모두 갈등 상태에 놓인다.
'필요'는 강한 충동을 야기한다.
대화에서의 갈등은 이런 필요라는 개념을 둘러싸고 생긴다.
집단에서 심각한 언쟁은 모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관점이 다른데서 발생한다.
그런 상황이 아니라면 언제든지 필요에 대한 협상을 통해 최우선 순위를 정하고 조정할 수가 있다.

 

이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라는 생각 떄문에 참으로 많은 것이 파괴되고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말이다.
'이것이'절대적으로 필요합니까? 라는 질문을 던지면 고조 되었던 갈등과 긴장이 상당히 누그러 든다.
갈등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탐색 할 수 있다.
더불어 대화 전체가 창조적인 새로운 영역으로 진입 한다.

 

절대적인 '필요' 를 주장하는 가정이라면, 바로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교착상태에 빠졌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처해야 한다.

 

기술적인 것들, 구현레벨에서의 필요는 강한 충돌을 야기 하지 않는가?

너무나도 필요로 했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정말 절대적으로 필요한것 인가?

 

트레이드오프가 있지 않는가?

트레이드오프를 인지하고 균형잡힌 시각으로 바라볼수 있지 않았는가?


Tidy First? 에서의 켄트벡의 말처럼

코드 정리가 당장의 기능 개발보다 더 중요할 수 있고, 다른 경우에는 빠른 기능 구현이 우선될 수 있기 때문에,
필요가 절대적이지 않으며, 상황에 따라 조정 될수 있다고 인지할수 있지 않는가?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낀 것들이 협력하는 대화의 참여자들과의 강한 충돌을 야기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창의적이고 유연한 대화에 있어서 교착상태를 유발하지는 않았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필요가 발생하는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문제와 역설


"The test of a first-rate intelligence is the ability to hold two opposed ideas in mind at the same time and still retain the ability to function."
first-rate- intelligence 에 대한 시험은 두 가지 상반된 아이디어를 동시에 염두에 두고도 여전히 기능할 수 있는 능력이다.
- F. Scott Fitzgerald -

 

문제 라는 단어의 의미를 살펴보면 거기에 의문을 품을 충분한 근거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현재의 난관을 문제 로 규정하고 대처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을 어렵게 만든다는 사실도 눈에 들어 온다.
이런 사고는 어려움을 해결하기는 커녕 상황 타개를 저해하는 중대한 걸림돌이 되고 만다.

 

문제라는 영단어 problem 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앞으로 내놓다 라는 의미다.
어려움 또는 부적절한 상황을 해결할 목적으로 제안된 아이디어를 토론이나 논의 대상으로 내놓는다는 것이다.

 

문제 형태로 아이디어를 내놓는 경우에는 암묵적이고 내재적인 일정한 전제가 깔려 있다.
이런 전제중 당연히 제기된 질문이 합리적이며 모순되지 않는다는 가정도 있다.
하지만 현실은 반드시 그렇지 않다.
때로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에 잘못되거나 자기모순적인 전제를 깔고 있는 불합리한 문제를 받아 들인다.
실질적이고 기술적인 영역에서 조만간 그것이 불합리하다는 사실을 간파 할수 있다.

 

간단한 예제로 이해를 도와본다.

예제 : 영원히 움직이는 기계를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머지않아 물리학의 기본법칙의 위배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하지만 심리적인 문제, 인관관계의 문제 등을 고민하는 경우는 어떨까?
그런 종류의 문제를 공식화하여 내놓는다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인가?

 

심리적으로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경우에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을 문제로 규정하면 잘못이 시정되기는 커녕 상황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이런 경우에는 문제가 있다기보다 오히려 역설에 직면했다고 말하는 쪽이 맞다.

 

역설이 문제로 취급되는 한은 결코 해소될 수가 없다는 사실이다.
문제로 취급되는 역설은 점증하는 혼란 속에서 덩달아 커지고 확산될 뿐이다.
일단 마음이 문제를 받아들이면 뇌가 해결책을 찾을 때까지 계속해서 움직이는 것이 사고의 본질적인 특성이기 때문이다.
...
마음이 역설을 진짜 문제인 양 취급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역설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붙잡혀 있게 된다.
문제는 해결책이 있지만, 역설은 해결책이 없기 때문이다.

 

사고의 움직임이 대상의 내용에서 상대적으로 독립적인 이런 상황은 실용이나 기술 분야 주제를 다룰 경우 타당하다.
하지만 우리가 자신에 대해, 특히 자신의 사고와 감정에 대해 생각하는 경우에도 타당할까?
이런 접근법이 곧 역설적인 방식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것을, 그것들을 생각하고 있는 자신의 사고와 분리된 독자적인 어떤 것으로 취급한다.
하지만 실제로 그런 분리와 독립성은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할 수도 없다.
이것이 바로 역설이다.

 

책에서는 아첨에 약한 사람이 예제로 나오지만,
이해한 내용을 기반으로 다른 예제를 만들어 보았다.

사회 불안을 겪는 사람을 예제로 위내용을 다시 살펴 보자.

 

사회불안을 겪는 사람은 타인의 시선과 평가에 지나치게 민감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사람은 자신의 사회불안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

 

사회불안은 대개 깊은 자기의식부정적 자아상에서 비롯 될 수도 있다.

이는 과거의 부정적 경험, 자신에 대한 비판적 사고, 그리고 타인의 평가에 대한 과도한 중요성 부여 등이 복잡하게 얽힌 결과일 지도 모른다.

 

이 사람이 사회적 상황에 놓이면, 즉시 불안감이 고조되고 자신의 행동을 지나치게 의식하게 된다.

이런 반응은 불편한 감정을 줄이기 위한 시도이지만, 실제로는 불안을 더욱 강화시키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어렵게 만들게 된다.

 

이제 이 사람이 자신의 사회불안을 '극복해야 할 문제'로 규정하고 이를 통제하려 한다고 가정해 보자.

 

여기서 근본적인 역설이 발생한다.

  1. 사회불안을 극복하려는 노력 자체가 자신을 더욱 의식하게 만들어, 오히려 불안을 증가시킬수 있다.
  2. 불안을 통제하려는 시도가 불안의 존재를 더욱 부각시켜, 그 강도를 높일 수 있다.
  3. 사회적 상황에서 '편안해지려는' 노력이 역설적으로 더 큰 불편함을 야기할 수 있다.

봄의 관점에서, 이는 '문제'가 아니라 '역설' 이다.

사회불안을 통제하려는 사고 활동이 통제 대상인 불안 그 자체에 의해 영향을 받는 상황이다.

이 역설은 단순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까지 살펴본 것 처럼 우리가 개인이나 사회의 문제를 생각하는 사고 과정 자체는 사고가 다루는 내용에 영향을 받고 통제되고 있다.
따라서 사고는 자유롭지 않으며 진정한 의미에서 정직하다고 할 수도 없다.
이런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강렬한 의식이다.
분석 대상에서 끊임없이 영향을 받는 혼란스러운 사고 과정에서 야기되는 오류를 초월한 의식, 혼란의 원인인 모순되는 전제와 감정을 꿰뚫어볼 능력이 있는 그런 의식이 필요 하다.
그런 의식이 있으면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관계에서, 궁극적으로는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자아' 라고 인식되는 우리의 생각과 감정에서 드러나는 많은 역설을 파악할 수 있다.
근본적으로는 분할되지 않는 전체를 염두에 두고 삶을 바라보고 지속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또한 지속적으로 진중하게 인간 정신의 속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태도가 필요하다.
오랜 세월 계속된 부주의와 타성으로 정신은 여러가지 역설에 빠져 있고, 그로 인해 야기된 어려움을 외부에서 생긴 '문제' 로 오인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사회불안의 사례에서 보듯이, 우리의 사고 과정은 그것이 다루는 내용에 의해 영향받고 통제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봄이 제안하는 것은 '강렬한 의식'의 필요성이다.

이는 우리의 혼란스러운 사고 과정에서 발생하는 오류를 초월하고, 모순되는 전제와 감정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사회불안의 예에서, 이는 불안을 '문제'로 인식하고 해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불안을 강화시키는 역설을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러한 의식은 우리의 일상생활, 사회적 관계, 그리고 가장 깊은 자아에서 드러나는 많은 역설을 파악할 수 있게 해준다.

 

봄은 또한 '분할되지 않는 전체'를 염두에 둔 삶의 태도를 강조하는데.

이는 사회불안과 같은 개인적 경험을 더 큰 맥락에서 이해하고, 그것을 단순히 '극복해야 할 문제'로 보지 않는 접근을 의미하는게 아닐까 이해를 해보았다.

 

강렬한 인식의 필요성을 알겠다.

 

그렇다면 많은 역설을 파악하기 위해서

모순되는 전제와 감정을 꿰뚫어보는 관찰에는 가정이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가?

 

관찰자와 피관찰자


 

"The eye sees only what the mind is prepared to comprehend."
눈은 오직 마음이 이해할 준비가 된것들만 본다.
- Robertson Davies -

 

가정은 정보를 선택하고 취합하는 일종의 관찰자 역할을 한다.
보통 우리가 관찰하는 도중에는 가정을 망각하고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해도 가정이라는 관찰자는 대상에 심오한 영향을 미치는 동시에 영향을 받는다.
상호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점에서 관찰 대상과 관찰자 사이에 거의 구별이 없다.
만약 감정이 관찰 대상이라면 관찰하고 있는 가정은 감정에 깊이 영향을 받으며 감정 또한 가정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
...
스스로의 마음을 들여다보면서 가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보는 전체 그림이 올바를 수가 없다.
가정이 관찰자가 되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기관찰에서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점이다
나는 지금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보고 있다 라고 말하지만 가정은 보이지않는다.
가정이 보고 있는 관찰자 이기 때문이다.
...
이래서는 근본적인 탐구가 불가능 하다.
진정한 대화를 하려면 민감성이 필요하다고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하는 모든 행동과 사고, 반응에 민감해야 한다.

 

감정을 관찰할 때 완전한 객관성은 불가능하다.
대신, 우리의 가정들을 인식하고 그것이 관찰에 미치는 영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관찰을 할 수 있으며 해야 할까?

 

유보, 육체, 자기 수용 감각


"The real voyage of discovery consists not in seeking new landscapes, but in having new eyes."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풍경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에 있다.
- Marcel Proust -

 

고유 감각, 고유수용성감각(proprioception)?

자신의 신체 위치, 자세, 평형 및 움직임(운동의 정도, 운동의 방향) 등에 대한 감각으로, 우리 몸이 어디에 위치해 있고 어떻게 움직이는지 아는 감각.

 

사고는 육체와 같은 고유 수용 감각(proprioception)이 결여 되어 있다.
우리는 신체의 위치와 움직임을 자연스럽게 인식하지만, 사고에 대해서는 그러한 직접적인 인식이 부족하다.
봄은 사고를 관찰하는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육체처럼 사고도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가능 할까?
주의를 기울여 사고의 다른 감각을 일깨우면 사고가 자기 수용 감각을 갖게 될까?

 

나는 분노, 폭력, 공포 등이 모두 유보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분노를 유보하면 분노에는 이를 지속적으로 유지시키는 특정한 사고와 가정이 있음을 알 것이다.
당신이 그런 가정을 받아들이면 분노가 계속될 것이다.
분노를 억누르는 쪽으로 반응할 수도 있다.
나는 화가 나지 않았어 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는 식으로 말이다.
여전히 화가 난 상태지만 분노 자체의 의식은 사라진다.
생각이 분노의 의식을 억누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로 인한 폭력성은 사라지지 않는다.
필요한 것은 분노의 의식을 억누르는 것도, 분노의 표출을 억누르는 것도, 그렇다고 분노를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칼날 위처럼 불안정한 중간 어딘가에 분노를 유보해두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하여 전체 과정을 볼수 있도록 말이다.
필요한것은 바로 이런 태도다.

 

그러므로 먼저는 그런 행동을 억누르지 않고 유보하는 것이 가능한가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억누르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지 말고 억누르는 과정 자체를 관찰한다.
억누르지 않겠다고 자기에게 말할 필요 없이 그저 지켜보는 것이다.
그런 행동을 유보하고 있는 관찰자의 존재가 느껴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런 유보를 관찰한다.
즉 요점은 유보를 위한 정해진 공식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나는 지금 공식이나 법칙, 처방이 아니라 탐구를 향한 출발을 권하고 있다.

 

만약 정말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서 이런 생각을 한다면

'나랑 정말 안맞아'

'너무 자기 생각만 맞다고 생각하는것 같아'

이런 사고들은 저절로 생긴다.

 

위와 같은 사고 때문에 어떤 반응을 할수도 있다, 심장박동수가 올라간다던지 다른 증상이 생길 수도 있다.

어떠한 강렬한 느낌이 올 수도 있다.

 

위와 같은 사고가 만든 감정들은 어떤식으로든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상대가 2,3초 전에 우리에게 무엇을 말했더라도 우리가 느끼는 반응과 상대방의 말이 연관되었다는 것을 모른다.

만약에 분노가 느껴진다면, 이 강렬한 느낌이 분노라는 감정이 느껴지는게 당연하다는 신호로 느낄 수도 있다.

그리고 분노를 정당화 하는데 위와 같은 감정을 활용할 수도 있다.

 

우리는 육체 과정의 강렬한 느낌 또는 충동에서 시작해서 결과 까지를 일종의 움직임으로 인식해야 한다.

사고 과정 역시 하나의 움직임이다.

다만 사고는 움직임으로 간주하지 않고 진실로 간주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고 과정을 관찰할 다른 방법이 있다.
사고를 일종의 반사체계로 보는 것이다.
반사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그에 반응하여 다른 무언가가 자동으로 일어나는 현상을 의미 한다.

 

반사 (反射, reflex)?

반사는 자발적이지 않으면서도 자극에 반응하여 거의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운동이다. 

반사는 명령이 대뇌 피질 이외의 중추 부위에서 나오는 것으로, 이는 감각기에서 나온 정보가 대뇌 피질의 운동령을 경유하지 않고 운동 신경에 보내짐으로써 일어난다

 

우리의 정신이 기억을 탐색하고, 적합해보이는 해답을 찾아내고, 찾은 해답을 말한 다음 적합 여부를 확인한다.
이런 전체 과정이 일련의 반사 행동이라고 본다.
...
논리적인 과정 전체도 일단 그것이 기억 속에 들어가면 일련의 반사가 된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사고' 라고 부르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정, 신체 상태, 물리적 반응, 기타 모든 것이 포함된다.
그렇다면 사고는 물질적인 과정의 일부가 된다.
사고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뇌와 신경계와 전신에서 발생한다.

 

만약 우리가 어떤 것이 진실이라는 통찰이나 인식을 갖고 있으면 그것이 실제로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
진실이라는 통찰이나 인식이 물질적인 과정에 깊이 영향을 줄수도 있는데.
이런 물질적인 과정에는 온갖 반사반응도 포함된다.
하지만 우리가 특정 상황에 지적인 혹은 추론적인 지식만 갖고 있다면 이런 과정에 깊이 영향을 주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를 통찰할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고가 물질적인 과정이라는, 즉 사고가 항상 인식에 반응하고 참여하고 있다는 통찰을 갖고 있는가?
있다면 일부 장애물을 제거해줄수 있을것이다.

 

사고가 뇌와 신경계 전체에서 발생하는 물질적인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는 사고를 일종의 '반사 체계'로 설명하는데, 단순한 자극-반응 관계를 넘어서는 복잡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사고는 기억을 탐색하고, 해답을 찾아내며, 그 적합성을 확인하는 과정을 자동적으로 수행한다.

이 과정은 감정, 신체 상태, 물리적 반응 등을 모두 포함한다.

이런 의미에서 사고는 '반사'와 유사하지만, 단순한 수동적 반응이 아닌 복잡하고 역동적인 과정이다.

 

사회 불안을 다시 예로 들자면

"사회불안은 대인 관계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라는 지적인지식,

"사회불안을 가진 사람들은 대체로 내향적 성격일 것이다" 라는 추론적 지식만 갖고있다면 이런 과정에 깊이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한다.

 

신체적인 신호부터 사고가 반사적으로 어떤 행동을 보이는지 파편화되지 않은 전체적인 관점에서

직접적으로 관찰하고 이해하는 통찰을 통해서

사고라는 물질적인 과정에도 깊이 영향을 줄수 있다고 말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사고 과정을 어떻게 더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

 

참여형 사고와 무한


"The meeting of two personalities is like the contact of two chemical substances: if there is any reaction, both are transformed."
두 인격의 만남은 두 화학 물질의 접촉과 같다.
어떤 반응이 있으면 둘 다 변형된다.
- Carl Gustav Jung -

 

참여(participation) 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뭘까?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초기 의미는 (뭔가를) 나누어 가지다 (to partake of) 였다.
다른 의미는 기여하기 위해 (어딘가에) 참여하다 (to take part in)라는 뜻이다.
현대에는 이것이 주된 의미가 되었다.
이는 개인이 전체 안에 받아들여져서 전체 안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전체를 함께 생각하는 이런 사고는 객체와 주체를 분리하지 않는다.

 

음식은 어떻게 우리가 되는가?
어느 단계에서 우리가 되는가?
대상으로서 음식과 우리의 일부가 된 음식을 구분하는 경계선은 어디에 그을 수 있을까?
음식을 분리된 대상으로 보는 관점은 뭔가 잘못되어 있다.
사실형 사고는 파편화를 조장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에 참여형 사고는 사물을 통합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참여형 사고가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니다.
...
히틀러 시대 독일 호프집도 예에 속한다.
서로 하나 되는 참여형 사고 속에서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고 서로를 독려 했다.
하지만 실제 행동으로 옮겼을 때는 상황이 생각만큼 근사하지 않았다.
참여형 사고라는 개념이 반드시 완벽한 행복을 보장하는 공식은 아니다.

 

그래도 집단적으로 뭔가를 해내려면 참여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참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사실형 사고와 혼동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참여형 사고와 사실형 사고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
내면적, 심리적 영역에서도 어느정도는 사실형 사고가 필요하고, 외적인 영역에서도 어느정도 참여형 사고가 필요하다.
완전히 선명하게 경계선을 그을 수는 없다.

 

대화 집단에서도 마찬가지다.
참가자는 저마다 다르다.
...
저건 그의 관점이고 이건 나의 관점이야 라는 식으로 구분하고 나누는 사고에 익숙하고 거기에 영향을 받는다.
이런 태도는 옳지 않다.
모든 관점은 사고에 불과 하다.
어디에 있든 사고는 사고일 뿐이다.
사고라는 점에서 모두 하나이며 같다.
에스키모가 바다표범을 보고 무수히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모두 하나의 바다표범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에스키모의 그런 태도야 말로 참여적 사고, 참여적 관점이 진정으로 기능하고 있는 예다.

 

하지만 사실형 사고만 고집한다면 참여의 여지는 없다.
이런 사람은 오직 외부로 드러나는 기계적인 인관관계만 생각한다.
또한 자아가 별도의 객관적인 실체로 존재하며 모든 것이 자아로부터 나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정한 참여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는 사고가 구별을 만들어낼지라도 여전히 참여가 존재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 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고와 감정사이, 그밖에 어떤것들 사이의 구별이든 구별속에서 참여가 존재한다.
궁극적으로 세상 모든 것이 본질이 상호 참여라고 말하고 싶다.

 

참여형 사고는 구별 속에서도 참여가 존재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봄은 우리의 사고가 구별을 만들어내더라도 여전히 모든 것이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고 말을 한다.

 

봄은 음식이 우리 몸의 일부가 되는 과정을 예로 들어 참여형 사고의 본질을 설명한다.

음식과 우리 몸 사이의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듯이, 참여형 사고는 사물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통합적인 시각을 제공한다.

이는 사실형 사고가 세상을 파편화하는 경향과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봄은 참여형 사고가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데,

히틀러 시대의 독일을 예로 들며, 참여형 사고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경우 위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따라서 참여형 사고와 사실형 사고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봄은 대화 집단에서의 참여형 사고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각 참가자의 관점을 개별적으로 구분하는 대신, 모든 사고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인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는 에스키모가 무수히 많은 바다표범을 하나로 인식하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궁극적으로 봄은 세상의 모든 것이 본질적으로 상호 참여의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우리의 사고가 구별을 만들어내더라도, 그 구별 속에서도 참여가 존재한다는 것 이다.

이는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전체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닐까?

 

개인과 전체, 주체와 객체, 사고와 감정 사이의 구분을 넘어서,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고 참여하고 있다는 인식은 우리의 일상적인 사고 패턴을 넘어서는 깊은 통찰을 제공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더욱 통합적이고 전체적인 관점에서 세상을 이해하고 경험할 수 있게 될 수 있지 않을까?

 

전제 (前提)


전제(前提) 또는 전제조건은 논리학에서 새로운 판단을 도출시키는 미리 알려진 판단을 뜻한다.
- wiki -

 

논리학에서 전제란 새로운 판단을 도출시키는 미리 알려진 판단을 뜻한다.

 

데이비드 봄의 "대화란 무엇인가"를 통해 우리는 대화에 대한 새로운 전제들을 얻을 수 있다.

 

이 전제들은 우리가 일상적인 대화를 바라보는 방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이 든다.

 

봄이 제시하는 커뮤니케이션의 본질, 사고의 특성, 가정 유보의 중요성, 참여형 사고의 가치 등에 대한 인식은 우리가 대화에 접근하는 방식을 새롭게 할 수 있다.

 

봄의 통찰은 우리가 너무나 일상적이라 간과하기 쉬운 대화의 깊이와 복잡성을 일깨워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화에 대한 새로운 판단과 접근 방식을 발전시킬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더 풍부하고 의미 있는 커뮤니케이션을 실현할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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